음악이 건네는 감정에 귀 기울이며 자신만의 움직임을 그려온 댄서 L. 순수한 열정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며, 시간이 쌓일수록 더욱 단단해진 길을 만들어왔다. 화려함보다 진심을, 완벽함보다 변화의 과정을 선택하는 그의 춤. 그 담담한 리듬에 스며 있는 이야기를 함께 따라가보자.
인터뷰 上
L
융 : 먼저 간단한 본인 소개 부탁드릴게요.
엘 : 안녕하세요, L입니다.
융 : 반갑습니다(미소). 이번에 닉네임을 새롭게 정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엘 : 릭(LEEK)은 19살 때 만든 이름이었는데. 한 24살부터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좋아하는 게 그때보다는 더 명확해지기도 했고. 근데 이 전의 자아들도 없애고 싶진 않아서. ‘아예 줄여버리자.’하고 바꾸게 됐습니다.

융 : 그렇군요. <데스노트(DEATH NOTE)> ‘L’이라는 인물도 연상이 되는데요?
엘 : 거기에서도 영감을 많이 받긴 했어요. 제가 자주 쓰는 음악들이 어두운 느낌이 많기도 하고. ‘L’이 한 사람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라 한 존칭같은 느낌이거든요? 뭐든 다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름이다 보니까. ‘이걸 잘 들고 갈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융 : 좋네요(미소). 요즘 근황은 어떻게 되시나요?
엘 : 똑같이 연습하고, 수업하고. 헬스 다니는 거 정도? 일주일에 네다섯 번은 하려고 하고. (헬스가) 좀 삶의 원동력이 생기는 느낌? 너무 이곳저곳에서 들어오는 도파민이 많은 시대에 살다 보니까. 내가 스스로 만드는 도파민을 얻고자 시작했던 것 같아요.
융 : 너무 좋네요. 그럼, 이 여정의 시작이죠. 처음 춤을 추게 된 계기부터 여쭤보고 싶은데요.
엘 : 한... 초등학교 6학년 때? 장우혁 씨의 <시간이 멈춘 날>에서 핑거텃을 하는 부분을 봤는데, 너무 신기한 거예요. 그래서 ‘와... 나도 한번 해봐야겠다.’해서 집에서 혼자 계속 보면서 손을 따봤어요. 근데 진짜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러면서 무대 보고 따라 하는 정도로 시작했다가 중학교 때는 친구들 모아서 길거리에서 연습하고. 학예제 같은 거 나가고.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댄스부도 있고, 팝핑하는 형도 있는 거예요. 그땐 제가 스트릿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던 시절이라. 형한테 계속 물어보면서 아이솔레이션이나 웨이브, 다른 장르들에 대한 것들도 배웠죠.
근데 그때 마침 <댄싱9>도 하고 있었는데, 스페셜 쇼케이스에서 제이블랙(J-BLACK)님을 보고 쇼킹에 빠진 거예요. 그 이후로 형한테 힙합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고, 오천 형님이나 다른 선배님들도 알게 되면서 ‘아, 힙합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됐죠.
융 : 그럼, 그 이후부터 힙합을 배우신 건가요?
엘 : 바로 시작하지는 못했어요. 아빠는 제가 하고 싶은 부분을 잘 밀어주시는 편인데 엄마는 조금 더 안정적인 면을 고려하셔서 (춤을) 반대하셨거든요. 그래서 ‘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하고 받아들이고, 주어진 상황에서 댄스부는 그대로 하되 공부도 계속했었는데. 고2 후반쯤 시험을 치고 성적을 봤는데, 열심히 한 거에 비해 성적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 시기에는 진짜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다시 엄마를 설득시켰죠.
그러고 그 이후부터 춤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제가 엄청 시골은 아니지만, ‘군(郡)’에 살았다 보니까 동네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이 없었거든요. 다른 지역도 가본 적 없고, 애들이랑 다른 곳에서 노는 경우도 없었어서. 그런데 학원까지 버스로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매일매일 다녔다는 것 자체가. 지금 생각해 보면 큰 도전이었고, 그만큼 엄청 순수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융 : 와, 매일매일 가셨군요.
엘 : 매일매일 가고, 학교에서는 자고. 학원에 가서 다시 열심히 움직이고(미소).
융 : 택일을 했으니, 여기에 집중하겠다는.
엘 : 그렇죠(웃음). 그냥 학원에서 배우는 게 너무 재미있었고. 몸을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어요. 오로지 춤밖에 안보이고, 계속 이것만 보고 직진하는 느낌으로 했던 것 같아요.
융 : 좋네요. 그럼, 고3 때까지 학원에 다니신 건가요?
엘 : 네, 고3 끝나기 직전까지 학원에 다녔고. 그 이후에는 트레이비츠(TREYBEATZ)라는 팀에 합류하게 됐어요. 고프(Gof) 형이랑 씨저(C-zer) 형, 밍(Ming) 형이랑 다른 형들까지 한 9명 정도? “부산에서도 재밌는 거 많이 해보자!”하면서 의기 단합하는 팀이었죠.
융 : 춤을 제대로 배우신지 1년 만에 팀에 들어가신 건데. 그 자체가 너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엘 : 그래서 형기 형이 항상 “내가 춤 1년 춘 애들을 데리고 이렇게 했다니.”라고 하는데(웃음). 저도 다시 생각해 보면 솔직히 못 할 것 같거든요. 형도 그때쯤 서울에 올라갈지 부산을 계속 지킬지 고민하던 시기라고 들어서. 그래서 실력이 출중해서 들어갔다기 보다는 형기 형이 저를 같이 품어준 느낌이 되게 커서. 너무 고마웠죠. 든든하고.
융 : 그렇군요. 그럼, 이 팀으로 활동을 계속하신 건가요?
엘 : 한 1년 정도? 같이 새벽 연습도 하고, 당시에는 팀 배틀도 많았어서. 배틀도 준비하고, 되는 사람끼리 다른 행사에 가서 같이 놀기도 하고.
융 : 현재는 고프님과 엘님 모두 서울에서 활동하고 계신데 따로 계기가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엘 : 형이 저보다 먼저 올라갔었는데. 20살 때부터 형한테 의지를 많이 하다 보니까 가서도 연락을 자주 했거든요. 전화도 자주 하고, 연습 영상 보내면서 서로 물어보기도 하고. 저한테도 “빨리 올라오라고, 힘들어도 할 수 있는 게 많고, 재밌다.”라는 말을 많이 해줬었는데. 초반에는 크게 공감이 안 됐어요. 부산에서도 재밌게 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한 22살쯤부터는 코로나의 영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산에 있는 게 되게 재미없었어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점점 삶이 무료해지기 시작하면서? 서울이 되게 재밌어 보였어요. 그래서 바로 올라갔죠(웃음). 둘 다 멈춰 있는 걸 싫어하는 게 비슷한 점인 것 같아요. 더 재밌는 걸 찾아 나서고, 더 넓은 곳에서 놀고 싶어 하는 경향이 컸지 않았을까.

융 : 실행력이 뛰어나시네요(미소). 올라오셔서는 어떠셨나요?
엘 : 처음에는 엄청 방황했어요. 왜냐하면 그때도 브레인워시가 있었지만, 오픈 연습이 없었거든요. 계속 연습하러 갈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보니까 그냥 할 수 있을 때 움직이고. 일하고. 게임하고. 이걸 반복했었는데. 그래서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금전적으로도 그렇고.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좀 많이 잡혔지 않았나.
융 : 맞아요. 새로운 곳에 나를 놓이는 것 자체가 정말 쉽지 않은 부분인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이것도 결국 나를 위한 과정이니까 지나오실 수 있었던 것 같네요. 그럼, 이어서 엘님이 생각하는 ‘힙합’이라는 장르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엘 : ‘자유로움‘이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하나로 끝나는 느낌이 아니라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길들이 다양하고. 그 안에서 파생되는 장르도 많고. 시대에 따른 트렌드도 계속 바뀌니까. 이런 점이 제가 원하는 방향이랑 되게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멈춰 있고 싶지 않은. 계속 변화하고 싶은? 그래서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융 : 따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요소가 있다면 무엇인지도 궁금하네요.
엘 : 가장 나답게 표현하는 것. 결국, 이런 많은 방향성이 있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게 뭔지가 확실해져야 그걸 표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없으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게 되는 것 같아요.
융 : 나다움. 좋네요(미소). 그럼, 본인의 움직임을 언어로 정의해본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엘 : 사실 제 움직임은 언어보다 감정에 가까운 것 같아요. 노래에 따라서 감정을 이입하는 걸 되게 좋아하는데. 그래서 음악에 실린 감정. 열정, 슬픔, 행복 같은 것들을 온전히 표현하고자 하는 것 같아요.
융 : 그럼, 감정이 담긴 엘님의 이야기. 그 스타일을 찾아가게 된 과정도 되게 궁금한데요.
엘 : 초반에는 단순히 열심히 몸 움직이고, 힘주는? 그런 느낌이 되게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바뀐 것 같아요. 누군가가 답을 주지 않아도 살아가는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어 가듯이. 내가 좋아하는 길로 가면서 그 방향이 좀 더 뚜렷해진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영감받을 때도 물론 있었지만. 제 영상을 계속 돌려보고, 부족한 부분을 찾기도 하고. 그러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약간 변화를 줘보려고도 하고. 그렇게 연습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융 : 또, 앞서 근황에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티칭을 하실 때나 저지를 보실 때는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엘 : 수업은 그날의 주제에서 하나씩 들어가 보고, 다른 부분으로 파생시켜서 이어보는 식으로 진행하는 것 같아요. 제 스타일을 강요하는 것보다는 그 안에서 각자의 개성을 찾아주는 방향으로 가르치는 것 같고. 그 사람의 움직임에서 어떻게 하면 더 자기답게 표현할 수 있는지, 이런 요소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더 잘 전달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근데 저는 이런 부분을 (학생이) 물어보지 않는다면, 따로 먼저 이야기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궁금하지 않은데, 제가 말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먼저 질문한다면 제대로 좀 고민하고, 같이 찾아봐 주는 편인 것 같아요.
심사를 볼 때는 내가 좋아하는 움직임을 잘하는 사람에게 손을 드는 게 아니라 누가 더 나답게 표현했는지. 그 농도가 얼마나 짙은지를 보는 편이에요. 근데 예를 들어, 오로지 춤을 잘 추는 사람과 오로지 자기의 스타일을 잘하는 사람이 붙었다고 하면 디테일하게 그 퍼센테이지를 보는 느낌? 전자의 농도가 더 짙을 수도 있는 거니까.
인터뷰 下
KEEP MOVING
융 : 평소 연습은 어떤 방식으로 하는 편이신가요?
엘 : 몸을 움직이면서 시작하기보다는 딱 그 노래에 꽂혔을 때 표현되는 느낌들이 되게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포커싱을 먼저 하는 것 같아요. 음악과 몸에 포커싱을 맞춘 다음 움직이고. 음악을 귀에 흡수시키고, 마음을 열어서 표현하는. 그 상태에서 하나씩 움직이다보면 무브에 의미가 담기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서.
같이 연습할 때는 그 사람에게 영감받고. 그걸 또 풀어보려고 하고. 그러면서 동기부여가 되는 포인트를 많이 받게 되는 것 같아요. 혼자 연습할 때보다는 ‘지금 움직여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엄청 많이 든다고 해야 하나?
융 : 최근 특히 더 신경 쓰고 있거나, 연구해 보고 있는 개념이 있으신지도 궁금하네요.
엘 : 요즘 포즈(pause)를 많이 연구하고 있어요. 멈춤 안에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적인 부분들이나 멋을 조금씩 넣어보려고 하고 있고. 밸런스 그리고 포즈. 이 두 가지를 조금 더 섞어서? 스타일 만들기.
융 : 좋네요. 움직임에서의 큰 영향이나 영감은 주로 어디서 받는 편이신가요?
엘 :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정도? 캐릭터마다 가진 마인드가 엄청 재밌는 것 같아요. 춤이랑도 되게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 같은데. 애니에서도 “세계 제일의 1등이 될 거야.“라는 메시지가 많으니까. 뭔가 삶이 무료해지거나 움직이기 싫을 때 그런 영상들을 보다 보면 ‘아, 움직여야겠다.’하고 영감을 받는 것 같아요. 마인드적인 부분도 그렇고.
융 : 그렇군요. 음악은 장르에 상관없이 다양하게 듣는 편이신가요?
엘 : 네, 상황에 따라서 좋아하는 색의 음악을 듣는 것 같아요. 설거지할 때나 집안일을 할 때는 90년대 붐뱁을 듣기도 하고. 조용하게 있고 싶을 때는 아예 조용한 음악, 명상 음악을 틀어놓고. 돌아다닐 때는 신나는 음악들. 레이지(Rage)음악도 많이 듣고. 그러다 보니까 노래를 들으면서 당황하는 경우는 많이 없는데. 제가 생각했을 때 별로 안 와닿는 음악이 나오면 어떤 시대의 노래든지 다 좀 어벙어벙해지긴 해요(웃음). 안 좋아하는 부류의 음악을 딱 들었을 때?
융 : 어떤 장르나 성향의 음악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엘 : 들어도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는 음악이 몇 개씩 있거든요. 그런 게 딱 나왔을 때는 좀 많이 어벙해져요.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되지?, 단순히 춤으로만 표현해야 되나?’라는 생각이 들고. 근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감정이 없는 춤 자체는 제가 거기서 느낄 수 있는 게 없다 보니까 흥미도 안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음악들이 나왔을 때는 ‘그냥 하자.’ 약간 이런 느낌이고. 그게 아니라면 다 재밌는 것 같아요. 배틀 때도 그렇고.
융 : 그렇군요(미소). 그렇다면 춤 외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시는지도 궁금하네요.
엘 : 똑같은 것 같은데(웃음). 게임. 애니메이션. 넷플릭스. 사실, 이것만 해도 하루가 끝나요. 아침에 일어나서 밥 챙겨 먹고, 집안일 몇 개 하고. 나와서 연습실에 가요. 연습 좀 하다가 수업하고, 집에 가서 게임 몇 판 하고.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면 잘 시간이 돼요. 그래서 사실, 따로 취미생활을 할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없더라고요.
융 : 맞아요. 아무래도 제대로 하려면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하다 보니까. 다른 댄서분들도 이런 방향으로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으시는 것 같은데요(미소).
무대 위의 이름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부준형’은 어떤 사람인가요?
엘 : 스스로 되게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한번 형들한테 “되게 간단한 사람인 것 같다. 내 자신이.”하니까 자기가 생각했을 때는 아닌 것 같대요. 되게 복잡하대요.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까 맞는 것 같다고 느꼈죠.
단순한 부분도 있고? 복잡한 부분도 있고. 편한 사람들한테는 단순하게 굴고. 형들한테는 어리광도 많이 부리고, 의지도 많이 하는 편인데. 제자들이나 챙겨야 될 사람들에게는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하고. 방향성이나 생각들을 같이 고민해 주고, 잘 들어주려고 하고. 한 마디로 복잡하지만 단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융 : 그럼, 무엇이 준형님을 가장 행복하게 하나요?
엘 : 너무 많은데. 그냥 살아가는 것 자체가 행복한 것 같아요. 뭔가 ‘불행하다.‘라는 생각을 살면서 많이 안 해봤어요. 그래서 그냥 다 행복해요. 행복하고. 고마운 것도 많이 느끼려고 하는 편이기도 하고. 내 옆에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조차도 고맙고. 하루를 이렇게 보낼 수 있는 것도 행복한 편이고. 내 춤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행복하고. 제자들이 있는 것도 행복하고. 그래서 사실 ‘나만 나태하게 살지 않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되게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다 행복합니다(웃음).
융 : 너무 좋네요. 행복과 감사의 감정을 많이 받아들이고, 하루하루는 충실하게.
엘 : 네, ‘열심히 살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목표는 있지만 (MBTI) J처럼 완전 계획적인 느낌은 아니고. 조급함 없이 꾸준히 걸어가자는 마음인 것 같아요.
융 : 그럼, 댄서로 살아오시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면 언제였을까요?
엘 : 처음 팀에 들어갔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오로지 춤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되게 재밌었고. 그리고 그때 형들이랑 열심히 준비해서 서울 팀 배틀을 나갔었는데. 그때 저희가 우승을 했었거든요. 같이 노력해서 서울에 있는 사람들을 이기고 올라갔다는 것 자체가 형들과 하나를 이룬 것 같은 느낌이어서. 그 의미가 되게 컸죠. 그런 순수한 행복과 뿌듯함이 제일 기억에 좀 남지 않나.

융 : 좋네요(미소). 제일 기억에 남는 무대도 이 팀 배틀일까요?
엘 : 제일 기억에 남는 건 2022년도에 우승한 HIPHOPER'S NIGHT ANOTHER. 그게 제 첫 스카잔(Sukajan)을 입고, 처음 나갔던 배틀인 것 같은데. 그때 그 이미지를 계속 생각하고, 이런 것들을 오늘 사람들한테 보여줘 봐야겠다 했었는데. 그날 자신감도 엄청 컸고, 라운드를 할 때마다 음악이 저에게 입혀지는 느낌이 되게 많이 들었거든요. 16강부터 결승까지의 곡들이 전부 다 끌리는 느낌이었고. 그 무대를 내가 끌고 가는 느낌을 받았던. 그래서 되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융 : 그렇다면 많은 선택지 속에서도 계속 춤을 택하게 되는 이유, 그 동력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엘 : 춤 자체의 재미가 큰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너무 재밌고. 저는 한 번씩 꽂히는 곡이나 새벽에 되게 슬픈 노래, R&B에 춤을 출 때가 많은데. 그렇게 내가 느끼는 감정으로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춤을 출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짜릿하고. 계속 움직이고 싶게 하는 부분이지 않나.
삶에서의 원동력은 ‘배틀’이 가장 큰 것 같아요. 아무래도 계속 나를 보여줘야 되는 부분도 있고, 다른 댄서들을 보면서도 ‘와,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생각에 계속 움직이게 되니까.

융 : 그렇군요. 그럼, 이런 엘님에게도 슬럼프가 온 적이 있는지, 있었다면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나보내셨는지 궁금하네요.
엘 : 초반에는 (슬럼프가) 많이 왔었던 것 같아요. 슬럼프라는 게 뭔가 자신이 흥미롭게 추고 있는 한 부분이 고갈됐을 때 느껴지는 감정 같은데. 예를 들어 좋아하는 영화여도 막 미친 듯이 보면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니까 지루할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또다시 새로운 것들을 찾으면서 다른 영화를 만들고, 또 지루해지고. 다시 만들고. 이런 과정의 반복이라 생각하거든요.
저도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 춤추기 뭔가 부끄러워지고, 안 춰지는 시기가 있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 근데 어차피 이것 또한 나의 모습 중 하나니까. 이 모습을 그냥 받아들이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부터는 ‘슬럼프’라는 단어 자체를 머릿속에서 빼버렸어요. 그래서 지금은 그런 감정이 들면 ‘아, 지금 내가 변화하고 있구나. 그런 상태구나.’라고만 생각하고. 넘기는 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에게는 슬럼프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융 : (깊이 공감하며) 맞아요. 앞으로는 ‘변화 중’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네요(미소).
그럼, ‘L’이라는 댄서 혹은 ‘부준형’이라는 한 사람으로서의 꿈이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엘 : 말했듯이 결국 이 씬에 있는 사람이다 보면 정상에 한번 서보고 싶잖아요. 그게 제일 꿈이긴 한 것 같아요. 완벽한 정의를 내릴 수 없겠지만. 근데 사실, 정상에 안 서도 되긴 해요.
융 : 그렇죠.
엘 : 그런데 정상에 올라갈 수 있게끔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되고 싶은 사람이지 않을까. (정상에) 서면 더 좋고. 그 이후에는 좀 내려놓고 싶은 느낌이 들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겠지만 한 번 서봤기도 하고. 춤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미래를 생각했을 때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없을 것 같다. 돈벌이가 안 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면, 바로 다른 일을 한번 찾아볼 것 같아요.
좀 더 흥미 있고, 재미있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만한. 지금은 제가 하고 싶은 부분들을 이어가는 느낌이지만 그때부터는 ‘일’로 넘어가게 되는 거죠. 그렇게 살아가면서 가정을 꾸리지 않을까. 그래서 ‘최고의 가장‘이 되는 게 부준형이라는 사람으로서의 목표에요.
융 : 최고의 가장. 멋지네요. 시간이 지날수록 이 자리가 정말 무거운 자리라는 걸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엘 : 그렇죠. 학생 때는 뭔가 크게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아, 내가 되게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라왔구나.’를 느끼게 돼서. 그래서 지금 내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좀 더 사랑을 담을 수 있고, 긍정적이게 살 수 있는 거구나를 느끼니까.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커지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요즘 좀 많이 드는 것 같아요.
융 : 이제 어느덧 마지막 질문이네요. 춤추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유롭게 부탁드릴게요.
엘 : 그냥... 모두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췄으면 좋겠어요. 자신을 질타하기보다는 본인과 본인의 움직임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봐주고. 함께 춤추는 사람들, 옆에 있어 주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서로 기대고 응원하면서.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각자 원하는 모습에 다다르지 않을까(미소).

감정을 움직임으로 번역하며 자신을 표현하는 L. 그는 늘 자신의 속도를 기준 삼아, 남의 시선보다 마음의 결을 따라왔다. 기쁨도, 고민도, 무료한 순간마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신이 낼 수 있는 최선의 한 걸음을 이어가는 사람. 묵묵히 오늘의 리듬을 이어가는 그의 여정에 따뜻한 마음이 머물길, 그 온기가 앞으로도 L의 또 다른 내일을 단단히 밝혀주길 바란다.
기획 및 편집ㅣ유영매거진
인터뷰이ㅣ엘
음악이 건네는 감정에 귀 기울이며 자신만의 움직임을 그려온 댄서 L. 순수한 열정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며, 시간이 쌓일수록 더욱 단단해진 길을 만들어왔다. 화려함보다 진심을, 완벽함보다 변화의 과정을 선택하는 그의 춤. 그 담담한 리듬에 스며 있는 이야기를 함께 따라가보자.
인터뷰 上
L
융 : 먼저 간단한 본인 소개 부탁드릴게요.
엘 : 안녕하세요, L입니다.
융 : 반갑습니다(미소). 이번에 닉네임을 새롭게 정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엘 : 릭(LEEK)은 19살 때 만든 이름이었는데. 한 24살부터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좋아하는 게 그때보다는 더 명확해지기도 했고. 근데 이 전의 자아들도 없애고 싶진 않아서. ‘아예 줄여버리자.’하고 바꾸게 됐습니다.
융 : 그렇군요. <데스노트(DEATH NOTE)> ‘L’이라는 인물도 연상이 되는데요?
엘 : 거기에서도 영감을 많이 받긴 했어요. 제가 자주 쓰는 음악들이 어두운 느낌이 많기도 하고. ‘L’이 한 사람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라 한 존칭같은 느낌이거든요? 뭐든 다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름이다 보니까. ‘이걸 잘 들고 갈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융 : 좋네요(미소). 요즘 근황은 어떻게 되시나요?
엘 : 똑같이 연습하고, 수업하고. 헬스 다니는 거 정도? 일주일에 네다섯 번은 하려고 하고. (헬스가) 좀 삶의 원동력이 생기는 느낌? 너무 이곳저곳에서 들어오는 도파민이 많은 시대에 살다 보니까. 내가 스스로 만드는 도파민을 얻고자 시작했던 것 같아요.
융 : 너무 좋네요. 그럼, 이 여정의 시작이죠. 처음 춤을 추게 된 계기부터 여쭤보고 싶은데요.
엘 : 한... 초등학교 6학년 때? 장우혁 씨의 <시간이 멈춘 날>에서 핑거텃을 하는 부분을 봤는데, 너무 신기한 거예요. 그래서 ‘와... 나도 한번 해봐야겠다.’해서 집에서 혼자 계속 보면서 손을 따봤어요. 근데 진짜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러면서 무대 보고 따라 하는 정도로 시작했다가 중학교 때는 친구들 모아서 길거리에서 연습하고. 학예제 같은 거 나가고.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댄스부도 있고, 팝핑하는 형도 있는 거예요. 그땐 제가 스트릿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던 시절이라. 형한테 계속 물어보면서 아이솔레이션이나 웨이브, 다른 장르들에 대한 것들도 배웠죠.
근데 그때 마침 <댄싱9>도 하고 있었는데, 스페셜 쇼케이스에서 제이블랙(J-BLACK)님을 보고 쇼킹에 빠진 거예요. 그 이후로 형한테 힙합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고, 오천 형님이나 다른 선배님들도 알게 되면서 ‘아, 힙합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됐죠.
융 : 그럼, 그 이후부터 힙합을 배우신 건가요?
엘 : 바로 시작하지는 못했어요. 아빠는 제가 하고 싶은 부분을 잘 밀어주시는 편인데 엄마는 조금 더 안정적인 면을 고려하셔서 (춤을) 반대하셨거든요. 그래서 ‘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하고 받아들이고, 주어진 상황에서 댄스부는 그대로 하되 공부도 계속했었는데. 고2 후반쯤 시험을 치고 성적을 봤는데, 열심히 한 거에 비해 성적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 시기에는 진짜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다시 엄마를 설득시켰죠.
그러고 그 이후부터 춤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제가 엄청 시골은 아니지만, ‘군(郡)’에 살았다 보니까 동네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이 없었거든요. 다른 지역도 가본 적 없고, 애들이랑 다른 곳에서 노는 경우도 없었어서. 그런데 학원까지 버스로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매일매일 다녔다는 것 자체가. 지금 생각해 보면 큰 도전이었고, 그만큼 엄청 순수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융 : 와, 매일매일 가셨군요.
엘 : 매일매일 가고, 학교에서는 자고. 학원에 가서 다시 열심히 움직이고(미소).
융 : 택일을 했으니, 여기에 집중하겠다는.
엘 : 그렇죠(웃음). 그냥 학원에서 배우는 게 너무 재미있었고. 몸을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어요. 오로지 춤밖에 안보이고, 계속 이것만 보고 직진하는 느낌으로 했던 것 같아요.
융 : 좋네요. 그럼, 고3 때까지 학원에 다니신 건가요?
엘 : 네, 고3 끝나기 직전까지 학원에 다녔고. 그 이후에는 트레이비츠(TREYBEATZ)라는 팀에 합류하게 됐어요. 고프(Gof) 형이랑 씨저(C-zer) 형, 밍(Ming) 형이랑 다른 형들까지 한 9명 정도? “부산에서도 재밌는 거 많이 해보자!”하면서 의기 단합하는 팀이었죠.
융 : 춤을 제대로 배우신지 1년 만에 팀에 들어가신 건데. 그 자체가 너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엘 : 그래서 형기 형이 항상 “내가 춤 1년 춘 애들을 데리고 이렇게 했다니.”라고 하는데(웃음). 저도 다시 생각해 보면 솔직히 못 할 것 같거든요. 형도 그때쯤 서울에 올라갈지 부산을 계속 지킬지 고민하던 시기라고 들어서. 그래서 실력이 출중해서 들어갔다기 보다는 형기 형이 저를 같이 품어준 느낌이 되게 커서. 너무 고마웠죠. 든든하고.
융 : 그렇군요. 그럼, 이 팀으로 활동을 계속하신 건가요?
엘 : 한 1년 정도? 같이 새벽 연습도 하고, 당시에는 팀 배틀도 많았어서. 배틀도 준비하고, 되는 사람끼리 다른 행사에 가서 같이 놀기도 하고.
융 : 현재는 고프님과 엘님 모두 서울에서 활동하고 계신데 따로 계기가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엘 : 형이 저보다 먼저 올라갔었는데. 20살 때부터 형한테 의지를 많이 하다 보니까 가서도 연락을 자주 했거든요. 전화도 자주 하고, 연습 영상 보내면서 서로 물어보기도 하고. 저한테도 “빨리 올라오라고, 힘들어도 할 수 있는 게 많고, 재밌다.”라는 말을 많이 해줬었는데. 초반에는 크게 공감이 안 됐어요. 부산에서도 재밌게 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한 22살쯤부터는 코로나의 영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산에 있는 게 되게 재미없었어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점점 삶이 무료해지기 시작하면서? 서울이 되게 재밌어 보였어요. 그래서 바로 올라갔죠(웃음). 둘 다 멈춰 있는 걸 싫어하는 게 비슷한 점인 것 같아요. 더 재밌는 걸 찾아 나서고, 더 넓은 곳에서 놀고 싶어 하는 경향이 컸지 않았을까.
융 : 실행력이 뛰어나시네요(미소). 올라오셔서는 어떠셨나요?
엘 : 처음에는 엄청 방황했어요. 왜냐하면 그때도 브레인워시가 있었지만, 오픈 연습이 없었거든요. 계속 연습하러 갈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보니까 그냥 할 수 있을 때 움직이고. 일하고. 게임하고. 이걸 반복했었는데. 그래서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금전적으로도 그렇고.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좀 많이 잡혔지 않았나.
융 : 맞아요. 새로운 곳에 나를 놓이는 것 자체가 정말 쉽지 않은 부분인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이것도 결국 나를 위한 과정이니까 지나오실 수 있었던 것 같네요. 그럼, 이어서 엘님이 생각하는 ‘힙합’이라는 장르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엘 : ‘자유로움‘이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하나로 끝나는 느낌이 아니라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길들이 다양하고. 그 안에서 파생되는 장르도 많고. 시대에 따른 트렌드도 계속 바뀌니까. 이런 점이 제가 원하는 방향이랑 되게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멈춰 있고 싶지 않은. 계속 변화하고 싶은? 그래서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융 : 따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요소가 있다면 무엇인지도 궁금하네요.
엘 : 가장 나답게 표현하는 것. 결국, 이런 많은 방향성이 있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게 뭔지가 확실해져야 그걸 표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없으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게 되는 것 같아요.
융 : 나다움. 좋네요(미소). 그럼, 본인의 움직임을 언어로 정의해본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엘 : 사실 제 움직임은 언어보다 감정에 가까운 것 같아요. 노래에 따라서 감정을 이입하는 걸 되게 좋아하는데. 그래서 음악에 실린 감정. 열정, 슬픔, 행복 같은 것들을 온전히 표현하고자 하는 것 같아요.
융 : 그럼, 감정이 담긴 엘님의 이야기. 그 스타일을 찾아가게 된 과정도 되게 궁금한데요.
엘 : 초반에는 단순히 열심히 몸 움직이고, 힘주는? 그런 느낌이 되게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바뀐 것 같아요. 누군가가 답을 주지 않아도 살아가는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어 가듯이. 내가 좋아하는 길로 가면서 그 방향이 좀 더 뚜렷해진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영감받을 때도 물론 있었지만. 제 영상을 계속 돌려보고, 부족한 부분을 찾기도 하고. 그러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약간 변화를 줘보려고도 하고. 그렇게 연습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융 : 또, 앞서 근황에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티칭을 하실 때나 저지를 보실 때는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엘 : 수업은 그날의 주제에서 하나씩 들어가 보고, 다른 부분으로 파생시켜서 이어보는 식으로 진행하는 것 같아요. 제 스타일을 강요하는 것보다는 그 안에서 각자의 개성을 찾아주는 방향으로 가르치는 것 같고. 그 사람의 움직임에서 어떻게 하면 더 자기답게 표현할 수 있는지, 이런 요소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더 잘 전달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근데 저는 이런 부분을 (학생이) 물어보지 않는다면, 따로 먼저 이야기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궁금하지 않은데, 제가 말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먼저 질문한다면 제대로 좀 고민하고, 같이 찾아봐 주는 편인 것 같아요.
심사를 볼 때는 내가 좋아하는 움직임을 잘하는 사람에게 손을 드는 게 아니라 누가 더 나답게 표현했는지. 그 농도가 얼마나 짙은지를 보는 편이에요. 근데 예를 들어, 오로지 춤을 잘 추는 사람과 오로지 자기의 스타일을 잘하는 사람이 붙었다고 하면 디테일하게 그 퍼센테이지를 보는 느낌? 전자의 농도가 더 짙을 수도 있는 거니까.
인터뷰 下
KEEP MOVING
융 : 평소 연습은 어떤 방식으로 하는 편이신가요?
엘 : 몸을 움직이면서 시작하기보다는 딱 그 노래에 꽂혔을 때 표현되는 느낌들이 되게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포커싱을 먼저 하는 것 같아요. 음악과 몸에 포커싱을 맞춘 다음 움직이고. 음악을 귀에 흡수시키고, 마음을 열어서 표현하는. 그 상태에서 하나씩 움직이다보면 무브에 의미가 담기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서.
같이 연습할 때는 그 사람에게 영감받고. 그걸 또 풀어보려고 하고. 그러면서 동기부여가 되는 포인트를 많이 받게 되는 것 같아요. 혼자 연습할 때보다는 ‘지금 움직여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엄청 많이 든다고 해야 하나?
융 : 최근 특히 더 신경 쓰고 있거나, 연구해 보고 있는 개념이 있으신지도 궁금하네요.
엘 : 요즘 포즈(pause)를 많이 연구하고 있어요. 멈춤 안에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적인 부분들이나 멋을 조금씩 넣어보려고 하고 있고. 밸런스 그리고 포즈. 이 두 가지를 조금 더 섞어서? 스타일 만들기.
융 : 좋네요. 움직임에서의 큰 영향이나 영감은 주로 어디서 받는 편이신가요?
엘 :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정도? 캐릭터마다 가진 마인드가 엄청 재밌는 것 같아요. 춤이랑도 되게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 같은데. 애니에서도 “세계 제일의 1등이 될 거야.“라는 메시지가 많으니까. 뭔가 삶이 무료해지거나 움직이기 싫을 때 그런 영상들을 보다 보면 ‘아, 움직여야겠다.’하고 영감을 받는 것 같아요. 마인드적인 부분도 그렇고.
융 : 그렇군요. 음악은 장르에 상관없이 다양하게 듣는 편이신가요?
엘 : 네, 상황에 따라서 좋아하는 색의 음악을 듣는 것 같아요. 설거지할 때나 집안일을 할 때는 90년대 붐뱁을 듣기도 하고. 조용하게 있고 싶을 때는 아예 조용한 음악, 명상 음악을 틀어놓고. 돌아다닐 때는 신나는 음악들. 레이지(Rage)음악도 많이 듣고. 그러다 보니까 노래를 들으면서 당황하는 경우는 많이 없는데. 제가 생각했을 때 별로 안 와닿는 음악이 나오면 어떤 시대의 노래든지 다 좀 어벙어벙해지긴 해요(웃음). 안 좋아하는 부류의 음악을 딱 들었을 때?
융 : 어떤 장르나 성향의 음악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엘 : 들어도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는 음악이 몇 개씩 있거든요. 그런 게 딱 나왔을 때는 좀 많이 어벙해져요.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되지?, 단순히 춤으로만 표현해야 되나?’라는 생각이 들고. 근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감정이 없는 춤 자체는 제가 거기서 느낄 수 있는 게 없다 보니까 흥미도 안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음악들이 나왔을 때는 ‘그냥 하자.’ 약간 이런 느낌이고. 그게 아니라면 다 재밌는 것 같아요. 배틀 때도 그렇고.
융 : 그렇군요(미소). 그렇다면 춤 외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시는지도 궁금하네요.
엘 : 똑같은 것 같은데(웃음). 게임. 애니메이션. 넷플릭스. 사실, 이것만 해도 하루가 끝나요. 아침에 일어나서 밥 챙겨 먹고, 집안일 몇 개 하고. 나와서 연습실에 가요. 연습 좀 하다가 수업하고, 집에 가서 게임 몇 판 하고.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면 잘 시간이 돼요. 그래서 사실, 따로 취미생활을 할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없더라고요.
융 : 맞아요. 아무래도 제대로 하려면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하다 보니까. 다른 댄서분들도 이런 방향으로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으시는 것 같은데요(미소).
무대 위의 이름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부준형’은 어떤 사람인가요?
엘 : 스스로 되게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한번 형들한테 “되게 간단한 사람인 것 같다. 내 자신이.”하니까 자기가 생각했을 때는 아닌 것 같대요. 되게 복잡하대요.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까 맞는 것 같다고 느꼈죠.
단순한 부분도 있고? 복잡한 부분도 있고. 편한 사람들한테는 단순하게 굴고. 형들한테는 어리광도 많이 부리고, 의지도 많이 하는 편인데. 제자들이나 챙겨야 될 사람들에게는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하고. 방향성이나 생각들을 같이 고민해 주고, 잘 들어주려고 하고. 한 마디로 복잡하지만 단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융 : 그럼, 무엇이 준형님을 가장 행복하게 하나요?
엘 : 너무 많은데. 그냥 살아가는 것 자체가 행복한 것 같아요. 뭔가 ‘불행하다.‘라는 생각을 살면서 많이 안 해봤어요. 그래서 그냥 다 행복해요. 행복하고. 고마운 것도 많이 느끼려고 하는 편이기도 하고. 내 옆에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조차도 고맙고. 하루를 이렇게 보낼 수 있는 것도 행복한 편이고. 내 춤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행복하고. 제자들이 있는 것도 행복하고. 그래서 사실 ‘나만 나태하게 살지 않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되게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다 행복합니다(웃음).
융 : 너무 좋네요. 행복과 감사의 감정을 많이 받아들이고, 하루하루는 충실하게.
엘 : 네, ‘열심히 살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목표는 있지만 (MBTI) J처럼 완전 계획적인 느낌은 아니고. 조급함 없이 꾸준히 걸어가자는 마음인 것 같아요.
융 : 그럼, 댄서로 살아오시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면 언제였을까요?
엘 : 처음 팀에 들어갔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오로지 춤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되게 재밌었고. 그리고 그때 형들이랑 열심히 준비해서 서울 팀 배틀을 나갔었는데. 그때 저희가 우승을 했었거든요. 같이 노력해서 서울에 있는 사람들을 이기고 올라갔다는 것 자체가 형들과 하나를 이룬 것 같은 느낌이어서. 그 의미가 되게 컸죠. 그런 순수한 행복과 뿌듯함이 제일 기억에 좀 남지 않나.
융 : 좋네요(미소). 제일 기억에 남는 무대도 이 팀 배틀일까요?
엘 : 제일 기억에 남는 건 2022년도에 우승한 HIPHOPER'S NIGHT ANOTHER. 그게 제 첫 스카잔(Sukajan)을 입고, 처음 나갔던 배틀인 것 같은데. 그때 그 이미지를 계속 생각하고, 이런 것들을 오늘 사람들한테 보여줘 봐야겠다 했었는데. 그날 자신감도 엄청 컸고, 라운드를 할 때마다 음악이 저에게 입혀지는 느낌이 되게 많이 들었거든요. 16강부터 결승까지의 곡들이 전부 다 끌리는 느낌이었고. 그 무대를 내가 끌고 가는 느낌을 받았던. 그래서 되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융 : 그렇다면 많은 선택지 속에서도 계속 춤을 택하게 되는 이유, 그 동력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엘 : 춤 자체의 재미가 큰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너무 재밌고. 저는 한 번씩 꽂히는 곡이나 새벽에 되게 슬픈 노래, R&B에 춤을 출 때가 많은데. 그렇게 내가 느끼는 감정으로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춤을 출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짜릿하고. 계속 움직이고 싶게 하는 부분이지 않나.
삶에서의 원동력은 ‘배틀’이 가장 큰 것 같아요. 아무래도 계속 나를 보여줘야 되는 부분도 있고, 다른 댄서들을 보면서도 ‘와,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생각에 계속 움직이게 되니까.
융 : 그렇군요. 그럼, 이런 엘님에게도 슬럼프가 온 적이 있는지, 있었다면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나보내셨는지 궁금하네요.
엘 : 초반에는 (슬럼프가) 많이 왔었던 것 같아요. 슬럼프라는 게 뭔가 자신이 흥미롭게 추고 있는 한 부분이 고갈됐을 때 느껴지는 감정 같은데. 예를 들어 좋아하는 영화여도 막 미친 듯이 보면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니까 지루할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또다시 새로운 것들을 찾으면서 다른 영화를 만들고, 또 지루해지고. 다시 만들고. 이런 과정의 반복이라 생각하거든요.
저도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 춤추기 뭔가 부끄러워지고, 안 춰지는 시기가 있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 근데 어차피 이것 또한 나의 모습 중 하나니까. 이 모습을 그냥 받아들이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부터는 ‘슬럼프’라는 단어 자체를 머릿속에서 빼버렸어요. 그래서 지금은 그런 감정이 들면 ‘아, 지금 내가 변화하고 있구나. 그런 상태구나.’라고만 생각하고. 넘기는 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에게는 슬럼프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융 : (깊이 공감하며) 맞아요. 앞으로는 ‘변화 중’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네요(미소).
그럼, ‘L’이라는 댄서 혹은 ‘부준형’이라는 한 사람으로서의 꿈이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엘 : 말했듯이 결국 이 씬에 있는 사람이다 보면 정상에 한번 서보고 싶잖아요. 그게 제일 꿈이긴 한 것 같아요. 완벽한 정의를 내릴 수 없겠지만. 근데 사실, 정상에 안 서도 되긴 해요.
융 : 그렇죠.
엘 : 그런데 정상에 올라갈 수 있게끔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되고 싶은 사람이지 않을까. (정상에) 서면 더 좋고. 그 이후에는 좀 내려놓고 싶은 느낌이 들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겠지만 한 번 서봤기도 하고. 춤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미래를 생각했을 때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없을 것 같다. 돈벌이가 안 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면, 바로 다른 일을 한번 찾아볼 것 같아요.
좀 더 흥미 있고, 재미있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만한. 지금은 제가 하고 싶은 부분들을 이어가는 느낌이지만 그때부터는 ‘일’로 넘어가게 되는 거죠. 그렇게 살아가면서 가정을 꾸리지 않을까. 그래서 ‘최고의 가장‘이 되는 게 부준형이라는 사람으로서의 목표에요.
융 : 최고의 가장. 멋지네요. 시간이 지날수록 이 자리가 정말 무거운 자리라는 걸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엘 : 그렇죠. 학생 때는 뭔가 크게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아, 내가 되게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라왔구나.’를 느끼게 돼서. 그래서 지금 내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좀 더 사랑을 담을 수 있고, 긍정적이게 살 수 있는 거구나를 느끼니까.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커지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요즘 좀 많이 드는 것 같아요.
융 : 이제 어느덧 마지막 질문이네요. 춤추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유롭게 부탁드릴게요.
엘 : 그냥... 모두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췄으면 좋겠어요. 자신을 질타하기보다는 본인과 본인의 움직임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봐주고. 함께 춤추는 사람들, 옆에 있어 주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서로 기대고 응원하면서.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각자 원하는 모습에 다다르지 않을까(미소).
감정을 움직임으로 번역하며 자신을 표현하는 L. 그는 늘 자신의 속도를 기준 삼아, 남의 시선보다 마음의 결을 따라왔다. 기쁨도, 고민도, 무료한 순간마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신이 낼 수 있는 최선의 한 걸음을 이어가는 사람. 묵묵히 오늘의 리듬을 이어가는 그의 여정에 따뜻한 마음이 머물길, 그 온기가 앞으로도 L의 또 다른 내일을 단단히 밝혀주길 바란다.
기획 및 편집ㅣ유영매거진
인터뷰이ㅣ엘